용성관 석물 (龍城館 石物) - 지정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04호 - 소재지 : 남원시 동충동 192-4번지 - 시대 : 통일신라시대
용성관은 조선시대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된 건물로, 그 규모가 웅대하여 남원 광한루, 관왕묘와 함께 고대건물의 3걸로 불리웠다. 한때는 조선 태조의 전패(殿牌:전(殿)자를 새긴 나무패로 왕의 상징임)를 모시어 ‘휼문관’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후에 불에 타 다시 짓는 등 몇 차례의 보수 과정을 거쳤다. 한국전쟁 때 또다시 불에 타 지금은 건물의 기단 70여m와 이 계단석물 1기만 남아있다. 잘 다듬은 계단은 아래의 난간 양쪽에 반원을 그리듯 둥글게 처리된 석물이 놓여있는데, 표면에 도깨비상을 조각해 놓아 독특한 모습이다. 현재 용성관터는 용성초등학교가 들어서 옛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이 석물도 초등학교의 본관계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용성관이 처음 건립된 시기는 통일신라 신문왕 11년(691)이나 몇 차례의 재건으로 인해 이 석물의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다.
용성관은 통일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건립되어 조선시대에는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한때는 조선태조의 전패(殿牌)를 모시어 일명 휼민관(恤民館)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 휼민관은 정유재란을 맞아 남원성이 위태롭게 되자 병마사 이복남(兵馬使 李福男)은 본관을 그대로 두면 태조의 전패가 왜적에게 욕을 당할까 염려되어 소각하였다.
그 후 광해군 12년(1620년)에 부사 최여립(崔汝立)이 휼민관을 재건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얼마 안되어 화재로 소실되고 남쪽의 중문(中門)만 남게 되었다.
그후 숙종 6년(1680년)에 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재건에 착수하여 숙종 16년(1690년)에 부사 정협(鄭峽)이 대청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6.25때 폭격으로 또다시 전소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 용성관은 그 규모가 웅대하여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관왕묘(關王廟)와 더불어 고대 건물의 3걸로 불리어 왔으나, 지금은 용성초등학교 본관 계단으로 사용되는 돌계단 1기와 용성관 기단 70여m만이 남아 있다. 당초에는 계단 1기만 지정되었으나, 1994년 7월 15일 석물 29기를 추가로 지정하였다.
[양간공파/사온승공파/대사성공파] 24世 금우사는 1709년에 창건한 사우로 임란공신 금은공 諱 수연과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및 공의 아들 몽룡(夢龍), 몽린(夢麟), 몽필(夢弼), 몽령(夢齡), 몽업(夢業)을 배향하였다. 그후 대원군때 사우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복원하여 금은공을 주벽으로 아들 4형제를 좌우로 배향 향사한다. [향사일 : 음 3월 3일]
출처 : 광산김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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